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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천상병(미생지신(尾生之信)

웃어봐요 2012. 11. 7. 21:57

 

 

 

약속         천상병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새』. 조광출판사. 1968 : 『천상병 전집』. 평민사. 1996)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언제 한번 밥 한번 먹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말을 흔히 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다른 일이 있다거나

또 괜히 그냥 헤어지기 멋쩍거나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그냥 밥 한번 먹자고 얼버무린다.

이 말이 왜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잘 못 먹고 못 사는 시대에

마을 어른들을 만나면 하는 인사 중에 진지 드셨습니까

안부를 여쭙던 말이 있었다.

그처럼 먹는 것이 그만큼 곤궁하던 시절에

덕담으로 쓰였던 것처럼

우리 나라 사람들의 감춰진 속마음의 심성을

잘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살면서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언제 한번 밥 먹자' 라는 이 말이라고 한다.

관습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언어 부림의 차이인데

밥 한 번 먹자고 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고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누구라도 바람맞았다는 말을

산이나 강에 가서 바람맞았다고

알아듣지 않는 것처럼 밥 한번 먹자고 하면

그래 나중에 시간 나면 연락해 하고는

연락오기를 기다리지도

마음에 담아 두지도 않는다.

약속이 아닌 약속인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기다림이 무엇이든지 간에

약속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살아가면서 많은 기다림을

시의 화자처럼 필연코 가지고 살아간다.  


 


중국에서는 약속 또는 신의의 표상으로 애인을 기다리는

대표적인 인물로 미생이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미생은 중국 노나라 사람으로 어느 날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여자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지 않는 여자를 믿음으로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작달비가 내려 개울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생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기둥에

올라가 기다리다가 결국은 물에 휩쓸려 죽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생지신(尾生之信) 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신의가 두터워 신의로서

도리로 다한 사람의 본보기의 표상이기도 하고 또

하나는 명분에 묶여 융통성이 없고 원칙에 얽매여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는

버려야할 고지식한 교훈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약속만큼은 지켜야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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