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 보리암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고 했다.
훗날 태조 이성계가 이 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 왕조를 열었다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 굴은 금산 38경 중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낙산사 홍연암,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신도들이 연일 줄지어 찾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보광사의 부속암자였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 문화재 *
보리암전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74호) -
신라시대의 석탑과 유사하나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공 - 남해군청 문화관광과 055-860-3114
전국에서 3대 기도빨이 잘 받는 곳으로 유명한 남해 금산의 보리암에 다녀왔다...
기념품점에는 예쁘고 귀여운게 많았다..
* 문화재
보리암전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74호) -
신라시대의 석탑과 유사하나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해금산 상봉에 위치하고 있는 보리암 앞에 상주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서 있는 탑.
이 석탑은 여러 가지 전설과 얘기를 남기고 이다.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를 못했다.
그런데, 허태후가 탄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오니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 오게 된 것이다.
이 돌을 가지고 원효대사가 보리암 앞에 세웠다고 한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상륜부 이상은 파손이 약간 되었으나 후에 복원되었다.
석탑은 1층부터 3층 옥개석(탑의 맨 위쪽에 있는 덮게 돌)까지 높이는 1.8m이고 1층 한쪽의 길이는 1.2m이다.
3층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귀한 구슬 모양의 보주가 남아 있다.
보리암 삼층석탑 앞에 서면 남해 금산의 선경(仙境)과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의 미소도 함께 감상할 수 있고,
뒤로는 상주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다도해의 절경이 펼쳐진다.
즉 나침반을 놓는 곳에 따라 북쪽을 가리켜야 하는 나침반이 놓는 방향에 따라 동서남북이 모두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원리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부 풍수학자들은 탑 아래로 우주의 지기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방향을 못 잡는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탑 안에 사리가 있기 때문에, 혹은 온천수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금산의 기암괴석들...
해수 관음상의 자비로운 미소 띤 모습
장유선사가 세웠다고 하는 설화다. 장유선사는 허황옥 공주의 삼춘이다.
그런데 중인고의 아유타국 공주가 허씨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아유타국이 멸망하여
인도와 인접해 있는 중국으로 옮겨와 있을 때, 중국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공주의 삼촌인 장유선사가 인도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이때문일 것이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 사이에서 열 왕자를 낳았는데 그중 일곱 왕자를 장유선사가 데리고 출가를 했다는 것이다.
일곱 왕자를 데리고 출가한 장유선사가 거쳐간 곳은 영남일대에 많이 있는데
김해의 장유암은 그 확실한 사적지이고, 가야산과 지리산의 칠 부처가 모두 장유선사의 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장유선사가 처음 찾아든 곳이 가락국이 자리잡고 있는 김해에서 멀지 않은 이 금산 보리암이라는 것이다.
장유선사는 금산의 천태망상의 변화에 매혹되어 보리암에 터를 잡아 아유타국에서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지금의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때의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이다.
의상과 함께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행하다가 이산의 승경에 끌려 들어 왔는데,
온 산이 마치 방광(防光)하는 듯 빛났다고 한다.
초옥을 하던 원효는 이곳에 보광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후 보광사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감사의 뜻에서
사찰을 둘러싼 산의 이름을 금산이라 부르게 했으며
1660년 현종이 이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으면서 보리암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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