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예측할 수 없는 요소와 변수들로 하여
슬픔과 좌절을 주기
도 하고 때로 기쁨을 주기도 한다.
나는 어제 내 생의 첫사랑을 40여년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단지 그리움에 대한 회답의 결과로서만이 아니라 세월의 빠르고 덧없음
이라던가 또는 긴 시간을 건너 뛰는 기분이랄까 하여간 그 기묘한
복합된 기분은 옛사랑에 대한 감정으로서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여러가지 주제에 의한 생각들과
더불어 어젯밤을 지새게 만들었다.
그 여학생의 이름은 미쯔요이다.
고등학교시절, 우리학교 게시판에는 학생들의 영어훈련을 위하고
국제적 안목을 넓혀 주려는 취지로 국제 Pen Pal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국 친구를 원하는 외국 학생들의 주소가 올라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명에게 일본으로 편지를 보냈다. 곧 바로 회신이 왔었다.
그 이후로 그 일본 여학생과 나 사이에는 몇 년간 고교시절의 짧은
영어실력으로나마 순수한 열정과 인간적 애정이 듬뿍 담긴 편지들과
사진들이 많이 오갔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 때에는 내가 쓴 詩가 실려있던
校誌도 기념으로 한 권 보냈었다.
그 무렵 아버지께 pan friend 말씀을 드렸을 때 아버지는 미쯔요에
게 친히 장문의 편지를 쓰시고 좋은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말씀과 함께 최고급 김을 함께 선물하시기도 했다.
지금은 작고하신 아버지께서는 예전에 일본 육군비행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교 하셨다.
들었던 바에 의하면 아마 당시의 엘리트들이 많이 모인 곳이었던 것 같다.
그러하니 자연히, 마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누구에게나 있듯이 자신이
겪었던 일본인들의 정신적 문화에 대한 향수와도 같은 본능적 요소들이
아버지에게는 많으셨다.
70년대에 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하셨을 때,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으로,그 선생님을 한국으로 초대하셔
극진히 대접해드리던 것을 옆에서 본 기억도 있다.
양복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선물 받으신 그 연로하셨던 일본선생님은
참으로 감사해하시면서 “이것이면 앞으로 20년간은 잘 입겠다”며
고마워하셨던 기억도 난다. 창 밖에 탐스런 목련꽃들이 그득하던 날이었다.
그 선생님과의 교분은 선생님이 일본에서 작고하실 때까지 계속 이어졌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 아버지는 傷心으로 회사에 1주일간을 출근치
않으시고 집에서 상한 마음을 다스리고 계셨다.
일본과 연관 지어져 아버지 일생을 지배했던 思考는 일본으로부터 배우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정신”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그 분의 일본에 대한 향수와 정신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단합할 줄 모르고 날만 새면 분열에 세월 가는 줄 모르던 나라를
보아오셨기에 성품이 강직하셨던 아버지는 심지어 공개석상에서
“한국인들은 種子를 갈아버려야 한다”고 했다가 곤욕을 치르시기도 했다.
광주사태라 불리던 당시 직후 무렵이었다.
그런 아버지도 창업 후 가업으로 20여년간 발전시켰던 同種 업계최고의
회사를 80년대에 위장취업한 세 명의 고려대,서울대,연세대 운동권 출신
노조원들과 그들을외곽 지원했던 반정부세력들(도시산업선교회와 그 외
좌익단체들)의 끈질긴 분쟁선동으로 3년간 극렬한 태업과 파업 끝에
결국 파산해버렸다. 나는 회사의 차석 최고책임자로서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었기에 그들의 만행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버지는 이 일로 결국 홧병으로 돌아가셨다.
얘기가 옆으로 샜다,,,아무튼 미쯔요와는 몇 년간을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발전되도록 깊어졌다. 한번도 만나지 않았으나 깊은 연모의 정을 마음에 깊이
담았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첫사랑이었다.
그런데 미쯔요와의 연락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줍잖은 청춘의 방황을
시작했던 어지러운 어느 무렵부터 두절되어버렸다.
그후로 나는 그를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그런데 40여년이 지난 지금, 어느날 고등학교 동기생인 친구한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친구는 대뜸 고교시절 나의 love affair에 대한 審問부터 시작했었다.
하하 “너 고등학교 때 일본여학생 사귀었지?” “그 여학생 이름이 뭐냐?”로
시작해서 “미쯔요”였다고 답하니 “너, 내말 잘 들으면 만나게 해주마.
그 여학생 지금 한국에 있다”라는 것이었다.
“아 그래? 아니, 근데 대체 너가 미쯔요를 어케 아는거지?”했더니만
“야~내가 누구냐. 너 動線은 다 내 손바닥 안에 있는거야”라면서 아쉬우면
연락하라 하곤 전화를 딱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망할 녀석,,,ㅎㅎㅎ 작전이 제법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미쯔요 오야이쯔. 한번도 만난 적 없었지만 얌전하고 예의 바르고 사진으로
보아 무척 예뻤고 공부도 잘 했던 40여년 전의 그 여학생, 나의 첫사랑이었다. 별 수 없이 나는 그 친구에게 곧바로 전화를 했다.
밥 한번 산다는 조건으로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리고 어떤 경위로 미쯔요의 연락처를 알게 됐는지를 들었다.
미쯔요는 지금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서 와서 서울대학교
한국어학원에 다니는 중이었다.
수업시간에 담당 여선생님과 대화를 하다가 삼청동 정독도서관에 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곳이 옛날 Pan 친구가 다니던 학교라 둘러보고 싶어서
갔었다는 애기를 하자 그걸 듣던 여선생님이 자기 남편도 그 학교를 다녔는데
내가 그 남편과 친구사이가 되겠다고 생각, 남편인 내 친구에게 전해줘서
전화가 오게 된 것이었다. 참으로 묘하기도 한 緣들의 이어짐이었다,,,
미쯔요의 전번을 알게 된 나는 우선 전화기 문자로 연락을 보내보았다.
바로 문자 회답이 왔다. 너무도 반갑다는 마음들과 함께 몇번의 문자통신이
이어졌다. 미쯔요는 간단한 우리말과 글은 잘 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지금의 다시 연락이 됨이 “우라시마 다러우”를 연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것을 한국말로 설명할 실력은 못된다고 하였다.
나중에 내가 어머니께 그게 뭐냐고 여쭸더니 이야기를 해주셨다.
옛날 일본 동화였다. 바닷속 용궁에서 잠시간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육지로 돌아 온 우라시마는 자신이 용궁에서 보내며 느꼈던 세월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지상에서는 흘러가버려서 예전에 알던 이들은 아무도 없고
모르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더라는 이야기였는데, 지상으로 올라 와서 금지된
상자를 여는 어느 한 순간에 자신도 늙은이가 되버렸다는,,,그런 이야기였다.
길게 느껴졌던 시간을 지나고 보니 그것이 실은 한 순간 찰나에 불과했었다는, 또는 그 반대의 뜻으로, 삶과 시간에 대한 통찰을
동화로 전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우리는 비로소 첫 통화가 이루어졌고 시간을 넘어서는 듯한 기묘한
세월의 벽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기분으로 만날 약속을 정했고 어제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40여년만에 처음으로 만나보게 된 미쯔요는 이제 어린
손자까지 둔 初老의, 예의 바르고 깨끗하고 얌전한 여성이었다.
너무도 반갑고 기쁘다는 말과 함께 따뜻한 악수가 있었다.
녹음이 우거진 공원 벤치에서 서로가, 옛날의 이야기들과 살아 온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도 나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냈으나 내가 받질 못했음을 알게 됐으며, 10년 전에는 일본
영사관을 통해서 나를 찾으려 수소문한 일도 말해줬다.
그녀는 내게 보여줄 선물이 있다면서 곱게 포장한 포장지 안에서 물건
몇 개를 꺼내 놓았다.
아, 그것은 바로 40여년 전,,,내가 미쯔요에게 보냈던 나의 詩가 실려 있던,
이제는 빛이 바래고 노오랗게 변색돼버린, 고등학교 졸업 때 발간됐던
바로그 校誌였다.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표현하려 했던 고3 시절 나의
詩가 40년이 지나도 변함 없이 여전히 그 책갈피 안에 잘 남아있었다.
미쯔요는 그 시절 내가 보냈던, 지금은 빛 바랜 나의 옛 사진 몇 장도
고스란히 보관하여 보여주었다.
아버지께서 그녀에게 보내셨던 편지도, 이제는 아주 변색이 심했으나
또렷이 알아볼 수 있는 필체,,,상태 그대로 나에게 보여주었다,,,그녀는
담담한 미소와 함께 자기에게 편지를 보내주셨던 아버지께 지금도 감사하고
어머니께도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산다는 것이 참 짧게도 느껴지고 반대로
아주 길게도 느껴져서 시간에 대한 혼란감이 많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울컥 치밀었다.
하늘을 우러르니 초록 잎들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나는 왜 눈물이 솟았을까. 간단히 규정하기에는 인생의 너무 많은 것들을
내포한 만남이었다.
때 묻지 않고 순수하기만 했던 옛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시간의 덧없음,
인생의 無常함, 떠나버리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여전한 불효,
청춘의 문제, 그리고 40여년만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첫사랑에 대한 애틋함.
눈물이 솟았던 것은 하루를 보내고 나니 아마 그러한 것들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조금 정리가 되어지는 기분이다.
아 그리고 여기에 전하고 싶은 다른 말이 있다. 미쯔요는 한국에서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일을 보았다고 말했다.
한국사람들은 지하철을 타면 왜 전부 핸드폰만 들여다보는지 이상하다는
것이다. 주변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내에서 큰소리로 통화하는 게
너무 싫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지하철 내에서는 통화가 안되게 당국에서 통신연결을 끊어 놓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천안함 사건에서 한국사람들은 왜 북한에 화를
안 내는 건지 정말 이상하다고 말했다.
미쯔요를 보면 일본인들의 예절에 대한 모습을 잘 볼 수가 있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고맙고 감사했다는 말을 잊지 않고 아끼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된 것도 소중하고 귀중하게 보관한다,,,
思考에 있어서 매사 공손하고 겸손하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느껴 본지 오래고
잃어버린지 오래된 듯한 “인간’에 대한 향기를 다시 찾은듯한 기쁨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이 저녁식사도 나누었다.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같이 걸으면서 미쯔요는
또 다시 그말을 했다. 지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우라시마 다러우의 시간에 대한충격. 삶의 길이 마치 꿈과도 같은,
긴 세월의 단절 후에 재 연결이 제공해주는 감동,,,나에게 떠오른 많은
생각들이 제대로 정리되려면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