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박사의 백년해로(百年偕老)
장기려 박사의 생애
장기려는 (1911년~1995)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으며, 송도고보와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그후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의 제자로서 수련하였다. 당시 병원에 입원 중이던 문학가 춘원 이광수가 장기려 박사를 알게 되어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설이 유력하나, 장기려 박사 자신은 이를 부인한다.
1940년 나고야제국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47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냈다.
장박사의 월남과 그의 활동
그는 1950년 12월, 6. 25 동란 중, 평양 의과대학부속병원 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돌보다가 어쩔 수 없이 국군 버스를 타고서 차남 장가용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인 김봉숙 여사와 다섯 자녀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을 무료진료하면서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었다.
그후 서울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 카토릭대학, 인제의대 외과 교수 및 병원장등으로 인술을 가르쳤다.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을 설립하였고, 장미회(간질환자 치료모임) 창설, 부산 생명의전화 설립, 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에도 앞장섰다.
장기려박사는 194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하여 미개척 분야인 간장외과의 발전과 의료 인재 양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노년에는 병고(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백병원 명예원장으로서 집 한칸 없이 협소한 사택에서 지내면서 마지막까지 가난과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 받고 있다.
장기려 박사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별세하였고, 묘지는 경기 도 마석의 모란공원 내에 있다.
수상
이러한 공적으로 장기려는 1976년 국민훈장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으며, 1995년 인도주의 실천의사상 등을 받았다. 1996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에 헌액되었다.
장로교(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소속 장로였지만,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함석헌, 김교신 등과 교제했으며, 32년간 무교회주의 성격의 "부산모임" 집회를 자신의 병원 사택(舍宅) 과 사무실에서 주관했다.
장기려 박사의 천생연분
그는 늘 빛 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계속 혼자 살았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이런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으로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다가 끝내는 만나지 못하고 86세 되는 해 1995년 성탄절 아침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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