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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탁구 여왕 '덩야핑'의 도전정신...

웃어봐요 2011. 12. 13. 13:18



탁구 여왕 '덩야핑'의 도전정신을 배우자.




검색엔진 기업 지커(卽刻)닷컴의 CEO이자.
중국의 올림픽 영웅이라고 소개했다.
바로 그녀,
올림픽과 세계 대회에서 무려 18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탁구 마녀 덩야핑(鄧亞萍).

얼마 전 중국 인민일보 주최로 열린 ‘아시아 미디어 협력 포럼’에서 덩야핑은 주최 측을 대표해 기조연설을 했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 일부.
대학 입학 때만 해도 영어 알파벳을 몰랐다.
그런 그가 영국의 최고 명문대학에 유학을 가 박사학위를 따왔다.

탁구선수로서 더 이상 오를 나무가 없던 1997년,
그는 라켓을 내려놓고 영어 사전을 잡았다.
스물넷 나이에 칭화대(淸華)대 영문과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것이다.

당시 덩야핑은 알파벳의 A부터 Z까지, 대문자와 소문자를 온전하게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섯 살 때 라켓을 쥐었고 열세 살에 국가 대표가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것도 설렁설렁한 게 아니라 남들 1년 신는 운동화를 한 달 만에 갈아치울 정도였다.



그런 그가 4년 뒤 베이징 올림픽 유치 대사로 나서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어연설을 했다.
평창 올림픽을 딸 때의 김연아처럼 말이다.
그는 하루 14시간 학업에 매달렸다.
‘빨래집게 옆에 놓고 A자도 몰랐던’ 그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박사가 된 것은 선수 시절 몸에 밴 집념과 노력과 도전정신의 결과일 것이다.

그는 인민일보의 뉴스 검색 사이트를 중국에서 속도가 가장 빠른 범용 검색 엔진으로 탈바꿈시켰다.
엔지니어가 대다수인 직원 190여 명을 이끄는 CEO가 된 지 일 년 만이다.
네티즌의 눈동자 움직임을 감지해 사이트의 어떤 항목을 보고 있는지를 자동으로 집계하는 기술을 그는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만하면 덩야핑의 변신은 합격점이다.

불현듯 덩야핑(鄧亞萍)을 생각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떠오른다.

청춘의 꿈과 희망과 도전이 사라지고 ‘아픔’만이 남았다고들 걱정하는 세대다.
덩야핑이야말로 그런 젊은이들의 롤 모델로 적합하지 않을까.

덩야핑과 겨뤘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땠느냐고 물어보니...
“그때 한국 선수들은 기술보다는 정신력과 투지가 대단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런 게 어찌 탁구뿐이랴.




“탁구와 박사학위, 그리고 비즈니스 가운데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쉽고, 무엇이 가장 어려운 일인가.”라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
평범한 대답이었지만 감동이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

우리의 젊은이들이여,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보자.
그러면 덩야핑이 한 말처럼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여, 자기자신의 미래를 위해 보다 많이 투자해 보자.

아니 자기의 목표를 위해 몰입하는 행동을 습관화 해보자.
남보다 한발 앞서 출발하고 한발 앞서가는 자세를 갖자.



덩야핑(鄧亞萍)

1990년대 세계 탁구계를 주름잡았던 ‘탁구마녀’ 덩야핑(鄧亞萍)이
영국 명문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덩야핑은 이 대학 학위수여식에서
‘세계의 올림픽 브랜드 경쟁 - 2008 베이징올림픽 사례 분석’ 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덩야핑은 1995년과 1997년 세계선수권 2회 연속 3관왕 (단식ㆍ복식ㆍ단체전)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회 연속 올림픽 단ㆍ복식을 석권하는 등 탁구여왕으로 군림했었다.

그는 1997년 은퇴 후 대학에 진학해 명문 칭화(淸華)대와 영국 노팅엄대에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거친 뒤 2003년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에 진학해 5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선수촌 부촌장으로도 활약한 덩야핑은 “박사학위는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내 학력과 경험을 활용해 중국의 발전에 공헌을 하고 싶다”고 학위를 받은 소감을 밝혔다.


박인수 - 달빛

再構成 및 傳達 : 學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