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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을 기억하자

웃어봐요 2010. 7. 11. 22:30

맥아더 장군을 기억하자

                                                                             글: 윤 학 재


제물포(인천)가 구한말 개혁문화의 관문이었다면 지금의 인천은 한국전쟁으로 풍전등화
에 있던 대한민국을 살려낸 은혜의 항구다. 인천상륙작전은 군사전문가들이 5000분의1
밖에 성공할 확률이 없다고 했지만,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기에 성공할 수 있다고 고집 하면서 1950년 9월15일 대대적인상륙작전을 강행하
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서울로 진격한 한국 해병대는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 했다.

1950년6월25일 북한 이민군은 3년 이상 준비해 온 남침전쟁의 포화를 열고 물밀듯이
3.8선을 넘어 쳐들어왔다, 소련제 최신무기 T34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을 3일만에
들어오고 대전을 7월 20일에 점령했으며 거침없이 낙동강 까지 밀며 내려왔다.국군은
낙동강을 교두보로 최후의 방어선을 치고 UN군이 부산에 상륙하기를 기다리며 싸웠
다, 김일성은 부산을 8월15일까지  점령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북한군 15개사단을
낙동강 전투에 투입했다, 남한은 한국군 5개 사단, 미군 4개 사단이 낙동강을지키는
최후의 방어선 이었다.

일본에서 날아온 맥아더 사령관은 낙동강 전선을 시찰하고 “지켜라 아니면 죽는다.
(STAY or DIE)"라는 극한명령으로 낙동강 700 리를 피로 물들이며 사수했다. 이때
맥아더는 적의 허리를 끊는 인천상륙작전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지 3일 후인 9월18일 대구 칠곡군 다부동 전투에서 미군과 국군 1사단이 적의
포위망을 뚫고 북진을 시작했고 10일 만에 3.8선에 도착했다. 한국군 1사단이 3.8선
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을 불러 무조건 북진하라
는 무서운 명령을 내렸고 정일권 총장은 국군 1사단에 북진명령을 내렸다. 그날이
10월 1일 이었고, 정전 후에 그 날을 기념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하게 되었다.



백선엽 1사단장은 미 1기병사단과 M48 탱크 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북진의 선봉에
서서 인민군을 섬멸하며 밤낮으로 평양을 향해 달렸다, 드디어 10월19일 한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선봉으로 평양에 입성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이 평양에서 승리의 사열을 받고 있을 때, 이미 중공군 20만이
야밤에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 북부 산속에 숨어 있었고, 만주에는 또 다른 30만 중공
군이 도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압록강을 넘어온 20만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였던
국부군 포로들로 총도 없이 총알받이 소모품으로 북한전선에 투입된 것이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와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만주폭격문제를 놓고 매우 껄끄러
운 관계였다. 드디어 트루먼은 맥아더를 3차 세계대전을 불러올 위험한 인물로 보고
1951년 4월11일 맥아더를 중공군 침입을 몰랐다는 책임을 물어 사전 예고 없이 전격
해임 시켰다. 맥아더는 서구식 전술가였고 팽덕회는 산악전에 능한 전술가였다, 인해
전술로 병사를 총알받이 소모품으로 싸우는 ‘더러운 전쟁’ 사령관 팽덕회는 정상적
전술에 입각한 신사도 장군 맥아더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삼국지나 손자병법 전술
의 팽덕회 에게 맥아더는 속았다고 볼 수 있다.

맥아더는 70세 노병으로 5성장군의 육군 원수로 군복을 벗으며, 미국 상하원 합동회
의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는 연설을 남겼다.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전장에서 이기고 워싱턴 정치에서 진 장군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해임된 후 뉴욕에 머물고 있을 때 황재경 원로 목사님이 찾아갔었다,
한국을 지켜준 맥아더 장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앞으로 한국통일은 어찌 되느냐고
물었다, 맥아더 장군은 파이프 담배를 손에 들고 가볍게 떨며 “코리아는 통일의 기회를
노치고 말았소” 공산주의와는 타협은 있을 수 없소 오직 힘뿐이요.”라고 말 했다.
백전노장 맥아더 장군의 말은 진리였다, 우리는 지금도 남북분단의 민족비극을 체험의
역사로 쓰면서 맥아더장군의 말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 어떤 이념과 철학으로 싸웠나?  첫째는 인민군을 섬멸하고
한반도에 공산침략 음모를 막으려 했고, 둘째는 UN 결의에 따라 한반도 총선을 거처
민주주의 남북통일을 이루려 했다. 맥아더의 이런 이념이 워싱턴과 호흡이 안 맞아,
공산침략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 올리는 반쪽 승리로 휴전선이라는 새로운 분단의
선을 만들고 말았다.

한국전쟁은 한국군 20만 유엔군 5만의 거룩한 젊은 피로 국제공동묘지를 만들며 자유
민주주의는 지켰지만, 조국통일을 못하고 우리민족은 조국분단의 슬픈 역사를 부끄럽
게도 우리 스스로가 쓰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의 원흉 김일성, 스타린, 모택동은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트루먼, 이승만,
맥아더도 가고 없는데 휴전선 155 마일의 철조망은 누가 거두어 줄 것인가! 시대가
영웅을 낳는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한국전 에서는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전쟁이었다. 그 당시 맥아더의 작전대로 압록강 넘어 만주 땅에 중공군
전술기지를 폭격 했으면 유엔군은 승리했고 한국은 통일되었으며, 우리의 옛날 땅,
고구려 땅도 회복 하였을 것이다.

한국전에서 해임되고 군복을 벗은 전쟁 영웅 맥아더 장군은 1880년1월26일 미국
아칸소에서 출생했고 1964년 4월 5일 84세로 타계했다, 장군은 2000년 1월 뉴욕에서
101세로 작고한 부인 Jean Faircloth와 나란히 버지니아 노폭 맥아더 기념관에 안장
되어있다. 인천상륙작전 제60주년을 맞이하며 세계적인 영웅, 한국의 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부부의 명복을 빈다.




                          
- 맥아더 기념관을 다녀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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