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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목사들에게 찬송가 521장을

웃어봐요 2010. 6. 23. 07:09

 


521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 작사자 제임스 러셀 로웰  
이상한 목사들에게 찬송가 521장을!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

   


 나는 기독교인이기에 [김정일과 李대통령이 회담하고 북한정권을 지원하라고 요구한] 개신교 서명자 122명을 특히 마음에 두며 이 찬송가를 보낸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소망교회 곽선희 원로목사를 비롯한 5개 종단 527명의 종교인들이 소위 남북정상회담과 對北인도적 지원을 촉구하고 나섰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사탄의 세력인 악마 김정일과 만나야 하고 그에게 무조건 돈과 물건을 주어야 한다고 권하는 목사들에게 들려주고싶은 찬송가.
 
 
 -521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진리 위해 억압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날까지 서리라
 
  순교자의 빛을 따라 주의 뒤를 좇아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만 향해 가리라
  새 시대는 새 의무를 우리에게 주나니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전진하리 언제나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서 항상 지켜 주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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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가 521장 작사자 제임스 러셀 로웰은 19세기 지성인
 
 
  <작사자 소개>
  제임스 러셀 로웰
  James Russel Lowell (1819-1891)
  하버드大 교수와 駐英公使를 지낸 미국의 지성인

 
  보스턴 근교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을 벗하며 시와 소설을 읽고 라틴어를 익힘. 1838년 하버대 졸업 후 장래 진로를 놓고 사업, 목회, 의학, 법학 사이에서 번민하다 법학을 선택, 하버드법대를 거쳐 변호사 개업. 법대 재학 중에 시와 산문을 여러 잡지에 기고함.

 
  1840년 가을 시인 마리아 화이트와 약혼. 순결의식과 정의감이 강한 그녀의 영향으로 방종과 노예제도의 폐악을 시정하는 운동에 뛰어들어 존경을 받음.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월간 문학지 ‘파이오니어’를 창간해 호돈, 에머슨, 휘티어, 포우, 스토리, 파슨즈 등 훗날 미국 문단의 거목들과 교유했으나 불과 3호를 내고 눈병과 경험부족으로 폐간함으로써 문학에의 애착이 깊어짐.

 
  결혼 후 노모봉양에다 아내의 건강악화로 한때 은둔했다가 노예제도에 깊이 자각하여 일간지에 시를 기고. 1846년 런던데일리뉴스의 특파원직을 맡은데 이어 1848년 뉴욕의 노예제도 반대단체와 유대를 맺고 맹렬한 정신운동을 전개하여 문필가들과 교양인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다. 멕시코전쟁과 노예제도 반대운동에 적극 나섬. 모친 별세 후에 병약한 아내와 어린 자녀를 데리고 1851년 이탈리아로 갔다가 부친 와병 소식을 듣고 이듬해 11월 귀국. 1853년 10월27일 아내와 사별한 다음 비통한 가운데 새로운 정신활동 전개.

 
  1855년 겨울 조카의 권유에 따라 보스턴의 로웰대학에서 영국시인론을 강의함으로써 비평과 문학사로 입지를 굳혀 롱펠오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현대어 석좌교수로 추대되자 1년 해외연수 조건으로 수락. 독일에서 주로 지내다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프랑스어와 독일어 이태리어 스페인어를 두루 섭렵하고 1856년 귀국, 강의를 시작하여 20년간 교수직 유지. 1856년 딸의 보모와 재혼. 1875년 어틀랜틱지(The Atlantic: 오늘날도 발행됨) 창간과 동시에 초대 편집인으로서 높은 문학수준과 대담한 공론 제기로 주목을 받음.

 
  1877년 헤이스 대통령으로부터 스페인 주재 공사로 임명돼 스페인어와 문학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수완을 발휘. 1880년 영국 공사 발령을 받고 런던으로 옮겨 1885년 아더 대통령 퇴임까지 재임. 문필가로 영국에서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공식행사의 연설가로 자주 초빙됐다. 임기가 끝날 무렵 두 번째 아내의 사망으로 비탄에 잠김. 귀국 후에도 수차례 영국을 방문하여 세계적 명사가 됨. 하버대 최고의 표창을 받고 옥스퍼드, 캠브리지, 세인트앤드류스, 에딘버그, 볼로냐 등 유수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음.
 
  1891년 8월12일 엘름우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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