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료방/- ◈ - 자유글

진주만 기습과 아리조나 전함

웃어봐요 2010. 5. 6. 22:36
진주만 기습과 아리조나 전함

 

 

 

 

위 사진은 전후 상부 구조물이 철거된 아리조나의 잔해에 건설된 기념관으로, 아리조나는 참혹했던 진주만 기습을 상징하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침몰한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취역 당시 최첨단의 성능을 과시하였으나, 승무원 1,177명과 함께 진주만에 수장된 전함 USS 아리조나. 단 1차례의 폭격으로 참혹한 최후를 맞음. 수많은 미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낸 아리조나의 침몰 사진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진주만에서 발생한 미군 전사자 2,403명 중 무려 1,177명이 아리조나에서 발생할 정도로 아리조나 격침이 주는 의미는 너무나도 컸다.

 





오늘날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미 해군이었지만 적어도 1800년대까지의 미 해군은 사실상 영국 해군보다도 못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은 광대한 영토와 풍성한 자원을 바탕으로 대양 해군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1906년부터는 현대 전함의 시초로 불리는 영국의 드레드노트급에 필적하는 수준의 전함들을 건조할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1915년에 이르면 무려 14척째의 전함을 진수시킬 정도에 이르렀는데 당시 육군이 기관총조차 없어 영국군의 루이스와 프랑스군의 호치키스, 쇼샤 Mle 1915를 빌려쓰고 있던 것을 생각하자면 적어도 해군에서만큼은 미국이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에 꿀릴 것이 없었다. 더욱이 영국조차 쉽사리 해내지 못한 9년 이내에 14척이라는 전함을 건조해낼 정도의 수준은 미국의 조선술과 압도적인 경제력을 반영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처럼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에 건조된 최첨단 전함이 바로 본 포스트에서 소개할 USS 아리조나다. 아리조나의 정식 명칭은 BB-39, 즉 미 해군이 39번째로 건조한 전함이라는 의미다. 당시 미 해군의 대형함( 적어도 당시 기준으로는 그러했다. 그래도 전장 185.4m, 전폭 29.6m, 만재 배수량 32,567톤으로 타이콘데로가급보다 큰 크기다 )인 펜실베니아급 2번함으로 건조된 USS 아리조나는 1914년 03월에 건조에 착수, 이듬해 06월 19일에 뉴욕의 미 해군 조선소에서 진수되었다.



◀ 1922년부터 24개월에 걸친 현대화 공정을 통해 완전히 새롭게 탄생한 USS 아리조나

이 때까지만 해도 최신예 전함으로서 위용을 뽐내고 다녔지만 무료한 일상과 더불어 영화에 출연하는 등 전함으로서의 임무와는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함명인 USS 아리조나는 많은 이들이 보면 의아해할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아리조나주는 해안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내륙 주이기 때문이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인데 원래 함명은 미 해군장관의 고향인 노스 캐롤라이나가 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1916년 10월, 미 해군에 정식으로 취역한 USS 아리조나는 최첨단 기술이 반영된 최신예함( 오늘날로 치자면 세종대왕함 수준 )이었고 강력한 14인치 함포를( 오늘날 구축함들이 5인치를 탑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 무려 12문이나 탑재하고 있어 화력에서 결코 영국이나 프랑스 전함들에 뒤지지 않았고 거리 측정기와 사격 통제장치 등 정밀 장비 역시 당시로서는 가장 최신형들을 골라 탑재했다.


◀ 원래 USS 아리조나는 이러한 형태였다.

그야말로 배 자체를 뜯어고치는 성형미인이 된 셈. 하지만 마스트 자체는 삼각대식인 관계로 일본이나 독일의 전함들에 비하면 조금 빈티나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그야말로 미 해군이 영국 해군과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지만 초기 2년 동안은 이렇다할 실적이 없었다는 점이 USS 아리조나의 컴플렉스였다. 이는 동력 기관인 증기 터빈이 말썽을 일으켜 몇 개월 동안 도크에 들어가는 망신을 당한데다 하필이면 연료를 석유로 채용하는 바람에 당시 석탄으로 구동하는 영국 해군과의 보급 문제로 결국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보급 문제가 해결되어 아리조나는 간신히 대서양으로 출항했지만 이미 1918년 11월 말이라 독일이 항복한 이후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1922년 워싱턴 해군조약이 체결될 당시 USS 아리조나는 최신예 함이라는 이점을 살려 폐기 처분되는 구식 전함들의 대열에서 열외될 수 있었고 이후 미 해군의 현역으로서 태평양을 누볐지만 전쟁이 끝난 후의 군대가 다 그러하듯 매일같이 지루한 일상과 훈련의 반복만 기다리고 있었다.


◀ 1931년에 촬영된 USS 아리조나의 모습으로 이 때의 임무는 어이없게도 휴가가는 후버 대통령을 태우고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것!

참으로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화 시 전함의 한가한 신세를 보여준다. 이럴 때는 차라리 군사 전문지 기자들이라도 승선해서 취재해주면 적어도 함장이나 승무원들 입장에서는 무료한 일상을 벗어던지고 잡지에 실린 본인들과 아리조나를 보며 일과 후 즐거운 시간을 보내련만( 필자도 취재를 다니면서 느끼는 바지만 미군들은 본인들에게 잡지가 입수되건 안되건 간에 사진 찍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당시 카메라의 한계( 요즘같이 EOS 1D MarkⅢ나 D3, D300, EOS 50D같은 디지털 카메라들이 없었으니 )는 둘째치고 디펜스타임즈나 플래툰, 밀리터리 리뷰와 같은 군사 전문지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니....


이처럼 지루한 일상과 정비가 반복되는 와중에도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했고 USS 아리조나 역시 초창기와 달리 개량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개량 작업은 우선 수상기 탑재를 위해 캐터펄트와 크레인이 가설되어 정찰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아무리 당시 함포 사거리가 수준급이라지만 일단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한계상 함교의 높이는 지나칠 정도로 높았는데 이 정도로는 시계의 확보가 어려웠던 것이다.


◀ 1941년 12월 07일, 격침될 당시 USS 아리조나의 함장이었던 아이작 캠벨 키드

이 때 58세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라 하겠다. 그래도 훗날 키드급 방공 구축함 1번함 함명이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으니 편히 눈을 감기를 기원한다. 수상기를 탑재함에 따라 USS 아리조나는 적 함대를 보다 원거리에서 발견해 전투 태세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두번째 개량은 과거 전함들과 마찬가지로 선체의 선수부 측면에 장착된 5인치 부포 4문을 철거하는 일
러·일 전쟁이나 유틀란트 해전으로 대표되는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라면 몰라도 점차 주포가 대형화되면서 양측의 교전거리가 벌어지는 와중에 사거리가 짧은데다 선수부 측면에 위치하는 바람에 수시로 파도를 뒤집어써 녹슬기 쉬운 부포는 도리어 골칫거리로 작용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만약 부포가 필요하다면 어차피 USS 아리조나가 건조될 당시 22문의 5인치 부포를 탑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4문을 철거하더라도 18문이라는 수가 남아 근접 화력에서 큰 문제가 없으므로 선수부의 부포 4문은 곧 철거되었다. 하지만 USS 아리조나의 본격적인 현대화 개수 작업은 바로 1922년에 실시되었다. 1924년까지 24개월이라는 만만치 않은 기간을 들여 착수한 현대화 개수를 통해 USS 아리조나는 외형 자체가 "저거 아리조나 맞아?"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변경되었다.


우선 전함 전후방에 설치된 2기의 마스트는 철골 구조에서 굵직한 삼각대로 강화되었고( 솔직히 아리조나는 철골이나 삼각대나 상당히 빈티나 보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좋은 비교 대상으로 일본 해군의 나가토나 야마토를 추천한다 ) 지주가 바뀌니 상부 구조물 역시 완전히 새롭게 변경되어 사실상 신형 전함 1척을 건조하는 수준의 공정이 실시된 것이다.


또한 점차적으로 전함의 위협으로 부상한 공포의 신무기인 "어뢰"에 대한 대책으로 선체에 어뢰 방호구획이 추가로 신설되고 상갑판에도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추가로 장갑판을 부착했다. 또한 기존의 증기 터빈과 보일러 역시 출력이 강화된 신형으로 교체되었으니 그야말로 USS 아리조나의 현대화를 위해 배 자체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성형미인이 탄생한 셈.


뿐만 아니라 5인치 부포 6문을 추가로 철거해 12문으로 확정되었고 대공 방어를 위해 5인치 대공포 8문과 사격 통제장치( 88mm는 동생으로 보일 지경이다 )를 장착했다. 이처럼 난리법석을 피운 끝에 완성된 USS 아리조나는 완전히 새로운 전함으로 재탄생했고 오늘날 사진으로 흔하게 볼 수 있는 USS 아리조나의 모습은 바로 이 때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현대화되었어도 전쟁이 없는 평화시의 전함에게는 따분한 일상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1933년의 캘리포니아 지진 당시 아리조나의 승무원들은 잠시 상륙해 재난 구조와 치안 유지에 투입되었고( 해군이 졸지에 경찰과 소방관들로 전직 ) 1934년에는 영화 "해군이 온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USS 아리조나라는 네임 밸류인지 영화 자체가 재미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군이 온다는 1935년 아카데미 영화제 몇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그래봐야 USS 아리조나가 전함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것은 전혀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무기력한 일과의 연속이었지만 1930년대가 되자 USS 아리조나에게 기회가 왔다. 스페인 내전과 일본의 만주 사변에 이은 중일 전쟁의 발발, 그리고 독일에서는 나치스 정권이 집권하는 등 미국에게는 위기의 연속이었고 특히 미국, 영국과 더불어 해군 강국인 일본의 팽창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그 결과 당시 최강의 전함인 USS 아리조나는 USS 펜실베니아와 더불어 진주만으로 파견된다. 하지만 언제든지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던 USS 아리조나도 진주만에 오게 되자 문자 그대로 퍼져버렸다. 일단 하와이의 아름다운 풍경과 경쾌한 음악소리에 아리따운 아가씨들까지 길거리에 가득하니 도대체 군인들에게 뭐를 바라겠는가?


더욱이 아직 일본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긴 하더라도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대신 함장 아이작 캠벨 키드를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규정된 훈련만은 철저하게 실시했는데 하필이면 1941년 10월 22일, 기동 훈련 과정에서 전함 USS 오클라호마와 접촉 사고가 발생했다. 가해자는 당연히 USS 오클라호마로 들이받은 지점이 어뢰 방호구획이라 함체에는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아리조나는 몇 주 동안을 도크 신세를 져야했다. 그리고 2개월 후 마침내 아리조나 최후의 날이 왔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1941년 12월 07일 일요일, 오전 08시! 제로센 전투기의 엄호를 받는 일본 해군의 99식 함상 폭격기와 97식 3호 함상 공격기들이 진주만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41년 12월 07일, 마침내 진주만 공습을 위해 항공모함 아카기에서 이륙 준비를 하고 있는 제로센 전투기 21형들의 모습.


사전에 예상을 전혀 못했던 미 육군의 방심 덕분에 일본 해군은 2차례에 걸친 대공습을 통해 도크와 연료 집적소를 제외한 진주만의 주요 시설을 폭격하고 귀환할 수 있었다. 바로 일본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치밀하게 준비해온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시각, USS 아리조나의 함상에서는 함장 아이작 캠벨 키드를 비롯한 승무원들이 엄숙하게 대오를 갖춘 가운데 국기 게양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사실상 이런 상황에서는 5인치 대공포조차 발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미 해군조차 이것을 연습으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 삽시간에 99식 함상 폭격기와 97식 3호 함상 공격기에서 투하된 8발의 800kg 폭탄과 91식 개2 항공 어뢰가 USS 아리조나에 작렬했다. 승무원들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빠졌지만 아직 USS 아리조나의 진정한 치명타가 남아있었다. 오전 08시 10분, 800kg 폭탄 1발이 아리조나의 2번 주포탑을 관통해 탄약고로 내리 꽂혔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그리고 이 1발의 폭탄이 아리조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불과 몇 초뒤 요란한 폭음과 함께 USS 아리조나는 순식간에 탄약고 유폭을 일으키며 선체가 들썩였다. 이 폭발로 인해 전방 마스트와 상부 구조물들이 완전히 주저앉았고 선체 하부가 완전히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1번과 2번 주포탑이 순식간에 7m나 침하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너무나도 큰 폭발로 인해 USS 아리조나는 사실상 부력을 완전 상실한 채 그대로 마스트와 2번 주포탑 일부만을 남겨둔 상태로 진주만 해상에 가라앉아버렸다. 막대한 비용과 기간을 들여 현대화시킨 전함의 최후치고는 너무나도 허망했지만 USS 아리조나가 진정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계기는 바로 승무원들의 끔찍한 최후였다.


폭발과 화재로 이미 수백명이 즉사하거나 부상을 당했지만 순식간에 아리조나가 침몰하는 바람에 최소한 900명에 가까운 승무원들이 그대로 전함에 갇혀버린 것이다! 영화 진주만에서도 잘 묘사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두터운 전함의 장갑판을 절단해낼 수 없었기에 이들은 함내에서 구조를 요청하다가 밀려드는 해수에 서서히 하나 둘 익사하는 것으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공습 종료 후 최종적으로 집계된 사상자 수는 그야말로 미국인들을 분노로 몰아넣기 충분했다. 함장 아이작 캠벨 키드를 포함, 후에 아리조나 내부에서 구조를 요청하다 익사한 승무원들까지 합쳐 총 전사자는 무려 1,177명!


진주만 공습으로 발생한 미군의 총 전사자 2,403명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수치였다. 그리고 USS 아리조나의 격침은 미국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최소 900명에 가까운 승무원들이 구조도 받지 못한 채 산 채로 전함에 갇혀 익사한 이 비극이야 말로 진주만 공습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고 미국은 순식간에 전시 태세로 돌입해 풍부한 자원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기들을 쏟아내며 일본을 차례로 압박, 결국 원자폭탄 2발을 투하하며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 전쟁 이후의 아리조나
 

진주만 공습에서 격침당한 전함들은 대부분 인양되어 수리된 이후 실전에 투입돼 일본군에게 복수의 포탄을 날렸지만 USS 아리조나는 그렇지 못했다. 배 자체가 거대한 승무원들의 무덤이나 마찬가지인데다 워낙 파손 상태가 심각했고 인양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미 해군은 1942년 01월부로 USS 아리조나를 함적에서 지워버렸고 주포탑을 포함해 쓸만한 상부 및 함교 구조물들을 모조리 철거해갔다. 하지만 선체 자체는 너무나도 거대한 고철이나 마찬가지라 미 해군으로서도 이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고 특히 유출되는 연료들로 인한 해양 오염문제는 환경단체들의 거센 비난까지 샀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에서 생존한 이들을 포함한 시민들의 요구로 인해 아리조나는 단순한 잔해에서 기념물로 고려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58년 미국은 아리조나를 국가 기념물로 지정해 성역화하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 아리조나의 선체 상부에 기념관을 건립해 아직도 함내에 유해로 남아있는 900여명의 승무원들을 기리는 국립 현충원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 또한 1980년부터는 아예 관리 주체를 해군에서 국립공원 관리소로 이전시켜 문화재와 같은 대우를 하기에 이르렀다.


USS 아리조나 기념관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조문객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여전히 함내에서 연료가 흘러나와 환경단체와의 거센 충돌까지 받아내며 1941년 12월 07일, 진주만 공습의 역사적 증인으로서 건재해 있다.

 

 

 

음악 / Nini Rosso / Il Silenzio (밤하늘의트럼펫)
 

 


 
영화《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 1953)》에서
Frank Sinatra가 죽고난 후 Montgomery Clift가
눈물 흘리며 연주하는 모습 클리프트
 
제2차 세계대전 직전 하와이호놀룰루 미군기지 스코필드 부대에 전속돼 온
이등병 프루잇은 전직 권투 미들급 챔피언이다.
그는 과거 시합 중 상대 선수의 눈을 멀게 한 뒤로는
다시는 권투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하지만 중대장은 중대간의 권투 시합 때문에
그를 다시 링 위에 올려놓으려고 안달이다.

상사인 워든은 그런 프루잇을 이해하려 하는 편이다.
워든은 현재 중대장의 부인인 카렌과 몰래 밀회를 즐기고 있다.
한편, 프루잇에게 호의적이었던 안젤로는
영창 담당하사 마지오에게
미움을 받은 끝에 그만 죽고 만다.
 

 

전운 나팔을 구슬프게 불어준 안젤로의 복수를 하기 위해 프루잇은 마지오를 유인한다.
격투 끝에 마지오는 죽지만 프루잇
역시 중상을 입어 술집에서 사귄
알마라는 여인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때 라디오에서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방송하고 군인들의 소집 명령을 내린다.
프루잇은 알마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지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는데....

 

 

하와이 미군기지를 무대로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장면이 생생히 삽입됐지만
전쟁영화로 간단히 분류하기에는 곤란할 정도로 인간사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뛰어나다.
여유롭다 못해 나른한 부대 분위기 속에
각기 다른 갈등을 지닌
인간들이 비극을 향해 천천히 치닫는다.

 

 

 

 

 

전작 (하이눈)에서 도덕적 문제로 고뇌하는 인간형을 주인공을 빚어내
서부극에 리얼리즘의 공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은
프레드 지네먼 감독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8개 부문을 휩쓸었다.

 



니니로소. 당연 세계 최고의 트럼펫 연주가이다.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트럼펫터 Nini Rosso는 18세부터 일찍이 트럼펫 연주가의 길을 나선다. 고향 토리노 방송국에 처음 출연한 이래 잇따른 TV 출연을 통해 차츰 그의 음악 세계를 넓혀갔다. 격조 놓은 명쾌한 음색, 압도적인 파워로 트럼펫의 새로운 연주 스타일을 개척한 니니로소.

1963년 "트럼펫을 위한 발라드"가 발표되면서 그는 비로소 일류 연주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어서 1965년 너무나도 유명한 "적막의 블루스(밤하늘의 트럼펫)"의 발표와 함께 그의 인기는 절정으로 솟아오르며, 트럼펫주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전세계에 떨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자기 자신을 더욱 더 강렬하게 표현하고자 스스로 스프린트 레코드사를 설립, "방랑의 트럼펫", "밤 하늘의 블루스"를 비롯, 영화 [생과 사]의 주제가인 "방랑의 마치"등 명곡의 제작에 직접 참여한다.

1989년 12월말 한국모 기업의 후원으로 최초 내한공연을 갖고 수준 높은 한국의 팬들을 매료시킨 니니로소. 칸쵸네, 팝송, 영화음악, 세미 클래식에 이르는 폭넓은 음악 세계로써 우리를 편안한 안식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영원한 로맨티스트로 그의 이름은 기억될 것이다.

'◈ - 자료방 > - ◈ - 자유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가 노숙자  (0) 2010.05.10
누구나 후회없는 삶을 원합니다  (0) 2010.05.08
아름다운 壽石  (0) 2010.05.05
[스크랩] 중국의 신비로운 갈대피리 동굴  (0) 2010.05.05
Don Paulson 작품[꽃]  (0) 2010.05.05